2015년 4월 18일 토요일

pp. 11-13

Eldonita en la 20-a de majo, 2013
Verkita de LEE Jungkee(Sxlosilo)

Reta Libro-vendejo de SEK(www.esperanto.name)








  에스페란토 문화원을 개설하다

  KEA에서 일을 하면서, 나는 우리 운동의 성공이 새로운 에스페란티스토들을 산출하는 것에 있음을 결론내릴 수 있었다. 에스페란토 운동은 에스페란토어를 모르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에스페란토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 덕분에 발전할 것이다. 나는 새로운 에스페란티스토들을 산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에 사뭇 주의를 기울였다. 내가 KEA의 사무처장 직책에서 실패를 경험함에 따라 나는 1991년 12월 15일 서울시 서강동에 '서울 에스페란토 문화원(SEK)'을 개설하였다. 당시의 나의 이러한 도전은 한국인 에스페란티스토들의 눈에 합리적이지도 않고, 무모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사실, 거의 무일푼으로 두 맨 주먹만으로 돈키호테의 모험을 시작한 것이었다.

  꼭 1년 뒤에 문화원의 예산 전부를 건물 소유주에게 빼앗겼다. 결국 SEK는 여의도에 있는 최학선 선생의 사무실로 옮겨야 했고, 그리고 또 얼마 후 다시 이종온 선생의 호의로 양정동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나는 이 선생이 친절하게 마련해 준 장소를 한 번 더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강의실을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에스페란토어와 문화원을 사랑하는 많은 동지들에게 감사하게도 운 좋게 나는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명동에 위치한 지금의 자리에 옮겨올 수 있게 한 그들의 도움에 감사함을 전한다. 나의 전 생에서 SEK의 강습소를 위해 돈에 인색하지 않았던 그분들을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이다.


  2008년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

  2008년 2월 13일, 인도에서 열린 5회 아시아 에스페란토 대회에서 내가 UEA의 아시아 에스페란토 운동 위원회(KAEM)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지구 인구의 61 퍼센트가 살고있는 아시아를 대표한다는 면에서 그 임무는 나에게는 부담이 크고 무거운 것이었다. 나는 아시아에서 '에스페란토' 언어가 한창인 이 때에 이 언어가 의심의 여지없이, 그리고 실제적으로 국제 언어로서의 역할을 할 것임을 항상 강하게 믿는다. '아시아에 활기를 불어넣자!' 라는 슬로건 아래 아직 에스페란토의 씨가 전파되지 않은 곳에 에스페란토어를 전파하기 위해 나는 2009년 라오스를 방문했다. 나의 은사이신 이종영 의사는 한국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에스페란토 운동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함을 유념해야 한다고 항상 강조하였다. 만일 내가 그의 말을 오늘날까지 따를 수 있다면, 나는 기쁠 것이다.

  2008년 8월 30일, SEK의 200번 째 강습이 있었고, 'SEK의 200번 째 강습을 기념하며' 라는 타이틀과 함께 서울의 남산에 위치한 유스호스텔에서 기념 행사가 열렸다. 그 기념회에 대략 200명의 동지들이 17년에 걸쳐 에스페란토 교육을 끊임없이 지속시켜 이룩한 SEK의 200번 째 강습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 나는 지치지 않고 500번 째 강습까지 에스페란토를 전파할 것이고, SEK를 거쳐간 과거의 강습생들을 찾아 그들을 에스페란토의 장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현재는 2012년 11월 3일, 서울의 남산 유스호스텔에서 'SEK의 250번 째 강습을 기념하며'의 기념 행사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