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16일 목요일

pp. 8-10


Eldonita en la 20-a de majo, 2013
Verkita de LEE Jungkee(Sxlosilo)

Reta Libro-vendejo de SEK(www.esperanto.name)








  에스페란토와 만나다

  1971년 3월, 내가 이제 막 영남 대학교의 학생이 되었을 무렵 나는 운명처럼 에스페란토를 만났다.

  이미 에스페란티스토가 되어 있던 나의 친구 한덕섭의 추천으로 나는 대학교 에스페란토 클럽에 가입하였다. 그때 이 클럽은 몇몇 에스페란티스토들에 의해 이제 막 만들어진 클럽이었다. 내가 아직 기억하기로는 이영우와 박의건이라는 이름의 두 선배들이었다.

  이영우 선배는 나에게 에스페란토어를 배우기 위해 점심 식사 후 12시 반에 강의실로 오라고 말했다. 나의 에스페란토어 공부는 나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매일 30분씩 계속되었다. 당시 법학과의 이종하 교수님은 우리 클럽의 멘토이셨다. 우리의 작은 클럽실이 학교 안에서 유지될 수 있도록 해주신 교수님의 도움에 감사하다.


  일본인 에스페란티스토들과 만나다

  1971년 4월의 시작에 가까스로 에스페란토어 기본 코스를 마쳤을 무렵 대략 20명남짓의 일본인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에스페란토어를 통한 한국과 일본의 에스페란티스토들 사이의 학술 모임을 갖기 위해 대구시를 방문했다. 이 행사는 대구 은행 강당에서 열렸다.

  한국측에서는 이종하 교수님이 '이 씨 왕조의 법치 체계'에 대해 강의를 하셨고, 강봉길 선생님은 '한국에서의 에스페란토 운동'에 대해 강의를 하셨다. 사실 이 강의들은 이제 막 에스페란토어를 배우기 시작한 나에게는 퍽 감동적이었다.

  공식적인 만남이 끝난 뒤 곧바로 나는 비록 초보 에스페란티스토였음에도 고대의 도시 경주로 향하는 여행객 무리의 뒤를 따랐다. 사실 이 만남은 내 스스로가 백 퍼센트 열렬한 에스페란티스토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강한 동기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모임 뒤에 나는 구불구불한 에스페란토어로 Wada Masko에게 엽서를 보냈다. 그녀는 여행객 무리 중 하나로 교토에서 수학 교사로 있었다. 놀랍게도 나는 그녀가 나에게 보낸 이쁜 엽서를 한 장 받았다. 그 엽서는 나를 에스페란토에 대한 굳건한 신념과 함께 에스페란토의 세계로 빠지게 했다.

  우리의 첫 번째 소통 이후 12년 뒤, 1983년에 일본인 에스페란티스토들의 70번 째 대회가 일본 Oomoto교의 성지로 꼽히는 Kameoka에서 열렸다. 그 연회에서 나는 우연히 테이블 옆자리에 앉은 그녀와 재회했다. 그때 그녀 곁에는 그의 딸 'Amiko'가 있었고, 그녀의 성은 그녀의 남편의 성을 따라 TAHIRA로 바뀌어 있었다. JEI(Japana Esperanto-Instituto)의 외무의 임원과, UEA의 위원을 역임한 TAHIRA 선생은 우리의 운동을 위해 국제적 규모로서도 얼마나 활동적인지. 나는 개인적 경험을 기초로 새로운 에스페란티스토들에게, 초보자들에게 커다란 동기가 될 수 있도록, 그들이 외국 에스페란티스토들을 만날 것을 강하게 추천했다.

   

Senlaca semanto de Esperanto



지칠 줄 모르는 에스페란토 파종자


  한국의 수도, 서울의 움직임이 가득한 중심에 조용한 오아시스, ‘서울 에스페란토 문화원’이 있다. 그곳의 주인은 유명한 한국의 에스페란티스토 이중기이다.

  이중기 씨는 44세이다. 26년 전 그는 에스페란토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1982년에 그는 한국 에스페란토 협회의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우리는 한국과 중국 사이의 외교 상의 관계를 설립하기 전인 1989년에 만남을 가졌다. 나는 한국에 방문한 첫 번째 에스페란티스토로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나는 에스페란티스토 인터뷰를 승낙받았고 이중기 씨를 따라 에스페란토 그룹들과 에스페란토 수업에 참여하는 한국의 에스페란티스토들과 함께 만났다. 그도 마찬가지로 중국에 방문한 첫 번째 한국인 에스페란티스토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는 종종 북경에서 열린 71회 UK를 떠올렸다. 공통의 이상은 곧바로 우리를 친밀한 우애를 쌓게 했다. 그는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했다. 그는 두 나라의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아시아의 에스페란토 운동을 위해 자주 만남을 갖기를 바랐다.

  1990년에 이중기 씨는 서기장의 직책을 포기하고 두 명의 에스페란티스토들과 함께 에스페란토 서적과 간행물 들을 판매하기 위해 Librejon Gaja를 설립했다. 그러나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아 그 두 명의 에스페란티스토들은 그만 포기했다. 하지만 이중기 씨만은 남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서점은 한국의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에스페란토 책을 구입하고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장소다. 내가 이익을 얻을 수 없더라도 나는 그 일을 계속할 수 밖에 없다.” 그는 도심에서 그 책들의 정리와 번역을 했고, 그곳의 명칭을 ‘서울 에스페란토 문화원’으로 바꿨다.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그는 아무도 고용하지 않았다. 그는 아침에는 보험 회사에서 일을 하고, 정오 이후에는 문화원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책들과 간행물 들을 발송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에스페란토 강습회에서 에스페란토어를 가르쳤다. 그는 종종 밤 11시나 되어서야 귀가하기 일쑤였다. 30제곱미터의 방에는 에스페란토 관련 책, 간행물, 카세트 테잎, 비디오, 메모 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한국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책을 구입하고 에스페란토어를 읽거나 배우기 위해 매일 방문했다. 또한 외국 에스페란티스토들이 방문하기 위해 찾아왔다. 1995년 11월에 나는 그곳에서 타지키스탄에서 온 에스페란티스토를 만났다.


  에스페란토를 선전하기 위해서 이중기 씨는 매달 초급 에스페란토 강습회를 연다. 거의 4년 동안 46강이 열렸고, 360명 이상의 사람들이 다녀갔다. 누구든 지속하여 중급 코스를 공부한다. 나는 3개월도 안 배운 학생들이 나와 함께 빠르게 말을 할 수 있던 것에 경탄했다. 나는 이중기 씨에게 그 이유에 대해 물었고, 그는 대답했다. “그들이 똑똑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그는 머리를 많이 썼다. 강연에서 그는 가능한 많이 에스페란토어를 말하고, 외국 에스페란티스토들과 대화하고, Cxina Radio Internacia의 에스페란토 프로그램을 경청하게 한다. 그것은 학습자들에게 흥미를 끌게 할 뿐만 아니라, 학습자들의 수준을 끌어올리게 했다. 그는 그의 학습자들과 함께 매주 토요일 그들이 점점 에스페란토에 반하게 하는 에스페란토 모임에 함께 참여한다.

  이중기 씨는 또한 아마추어 라디오를 취미로 한다. 그는 종종 외국인들로부터 초청을 얻는다. 그는 아마추어 라디오인들이 많음에 주목한다. 그는 그들에게 에스페란토어를 추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언제라도 정력적으로 그들에게 에스페란토어를 선전하고 초대한다. 그들이 에스페란토어를 배우고 사용하게끔 장려한다. 그에게는 감사하게도 73명의 아마추어 라디오인들이 에스페란티스토가 되었다.

  내가 그에게 왜 수익이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원을 계속하느냐고 물었고, 그가 대답했다. “많은 나의 친구들이 나에게 그것을 포기하라고 권한다. 하지만 나는 거절한다. 왜냐하면 나는 에스페란티스토이자, 평화, 우애 그리고 진보가 나의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나는 기꺼이 이 일을 한다.” 그는 또 말한다. “현재 아시아의 에스페란토 운동은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우리, 한국과 중국의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좀 더 많이 힘써야 한다.”

  이렇게 존경할 만한 에스페란티스토가! 우리 중국인들이 이를 따른다면 우리의 에스페란티스토의 장은 항상 번창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