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12일 화요일

pp. 15-16

Eldonita en la 20-a de majo, 2013
Verkita de LEE Jungkee(Sxlosilo)

Reta Libro-vendejo de SEK(www.esperanto.name)








  자신에게는 근검하였지만 에스페란토를 위해서는 인색하지 않았다

  그가 KEA의 의장이 되었을 때, 임원 회의는 관례대로 KEA의 사문실에서 열렸다. 그는 서울에서 가깝지 않은 대구에 살고 있었으므로 회의를 앞두고는 숙소에서 밤을 보내야만 했다. 어느날 저녁 나는 그를 그가 예약한 숙소까지 배웅하였다. 나는 그가 호화로운 호텔에서 묵을 것으로 짐작하였다. 하지만 그곳은 서울의 어느 거리 구석에 있는 상상할 수도 없이 허름한 곳이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내가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동안 난 방을 볼 수 없어요. 나는 의미 없는 곳에 돈을 쓰고 싶지 않아요. 좀 더 가치있는 데에 돈을 사용하는 것이 더 좋지 않나요, 그렇죠?"
  1995년 '서울 에스페란토 문화원의 50번째 수업 기념'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그는 그가 살고 있는 대구시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이 행사에의 그의 참석은 나에게 큰 영광일 뿐 아니라 그 자리에 참여한 모든 참석자들에게도 큰 영광이었다. 당시에 나는 그의 차비가 적지만은 않은 금액이었기 때문에 그의 차비를 내가 지불하였으면 했다. 하지만 그는 조촐한 금액조차도 받지 않았다. 사실 그의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어느 에스페란토 만남의 시간을 축하하기 위해 대구에서 서울까지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에스페란토 운동을 위해 돈과 시간을 들이는 데에 인색하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안녕을 위해서는 모든 것들을 엄격하게 절약하였다.


  에스페란토를 향한 그의 열정

  에스페란토를 향한 그의 사랑은 끝이 없고 열정적이었다. 그의 전 생애에 그는 언제나 에스페란토를 확산하고, 새로운 계획들의 시행과 우리 운동의 리더들을 일하게 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멈추지 않고 새롭고 참신한 제안들을 제시했다. 우리들의 운동을 위해 기여한 한국 에스페란티스토들을 회상하기 위한 '선구자의 낮'. KEA에 가장 많은 회원을 가입시킨 사람을 위한 '에스페로 상'(현재의 '이종영 상'). 또, 그는 스스로가 에스페란토어 또는 한국어로 된 많은 서적들을 발행하였다.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분명 그는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에스페란토 운동에 있어서도 눈부신 공헌을 했을 것이다. 너무나 애석하게도 그는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1932-2008). 그는 그의 생에서 언제 어디서나 진심으로 에스페란토어를 사랑했다. 비록 그가 우리를 멀리 떠났을지라도 그의 에스페란토를 향한 사랑은 영원히 자멘호프 박사의 후예들의 가슴에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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